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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가진 여자'가 '진짜' 사랑에 빠지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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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다 가진 여자'가 '진짜' 사랑에 빠지는 순간

[리뷰] 드라마 <밀회> 종영에 부치는 연애편지

▲ <밀회> 포스터. ⓒJTBC
3월 17일 첫 방영을 시작했고 5월 13일 종영을 앞둔 JTBC 드라마 <밀회>는 숱한 화제를 낳았다. 충성스런 '밀덕'(<밀회> 덕후)을 무수히 양산한 이 매력적인 드라마의 핵심은 무엇일까. 재벌가와 음악계라는 주요 공간을 단단하게 묘사하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가치관의 치열한 전쟁을 따라가다 보면, 등장하는 인물들이 (아주 작은 배역이라 할지라도) 명확한 인과관계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을 납득할 수 있다. 운명의 도움이라든가 우연이 빚어낸 기적의 손길 같은 장치 없이 오로지 등장인물의 두뇌와 감정만이 이 난관들을 뛰어넘는 근본이 된다. 시청자들은 마치 오혜원이, 이선재가, 강준형이, 한성숙이 실제 서울 어딘가에 살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은, 이를테면 1960년 영화 <하녀>(김기영 연출)를 보며 "저 년 죽여라!"하고 소리지르던 아주머니 관객들의 착각과 아주 다를 것 같지 않다. 징그럽도록 현실감을 밀착시킨 드라마 <밀회>에게, '아주 사적인' 연애편지를 띄운다.
<편집자 주>

JTBC 드라마 <밀회>(연출 안판석, 각본 정성주)의 제목을 처음 듣는 순간, 이 드라마의 원안이라는 일본 소설 및 영화 <도쿄 타워>가 아니라, 데이빗 린의 영화 <밀회(Brief Encounter)>(1945)가 자동적으로 연상되었다. 영화 <밀회>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음울한 이별의 전주곡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드라마 <밀회>는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43번'을 격렬한 운명의 전주곡으로 활용했다. 영화 <밀회>에서는 각기 가정이 있는 두 남녀가 중앙역 인근 카페에서 마주치고 사랑에 빠지고, 드라마 <밀회>에서는 세련된 커리어 우먼이 20살 연하의 퀵서비스 배달원이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피아니스트와 사랑에 빠진다.

동일한 제목, '불륜'이라는 주제를 공유하고 있지만 영화 <밀회>와 드라마 <밀회>가 갈리는 지점은 여기서부터다. 40년대 미국 소도시의 평범한 중산층 남녀는 도덕심과 공동체의 윤리에 짓눌렸지만, 2014년 한국의 상류사회 여성과 하층민 남성은 결혼과 가족이라는 제도보다 더 큰 장애물 앞에서,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사랑해야 한다. 둘의 사랑은 둘을 둘러싼 환경의 모순을 까발리는 불협화음이 된다.

욕망의 한계를 시험한다

"아줌만 다 가졌으면서 왜 그래요?"(<밀회> 13화 박다미가 오혜원에게)

위의 인용문이 JTBC 드라마 <밀회>의 핵심을 압축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왜 다 가지려고 그래? 이미 충분하지 않아?"라는 질문이야말로 한국사회의 분노의 방향을 압축한 것일 게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들은 결코 떳떳하지 못하다는 심증은 (그 심증이 확신으로 공론화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냉소적인 소규모 반격으로만 그 발톱을 꺼내 보인다.

SNS 상에서의 대화 도중 <밀회>의 주 시청자층(혹은 그렇게 될 것이라 여겼던)인 여성 중 다수가 스무 살 이선재(유아인)의 엄마에게 빙의하며 마흔 살 오혜원(김희애)을 질시하며 감정이입하지 못한다는 얘길 들었다. 대체 왜? 사실, 서른 살 넘어간 여성들이라면 모두 20살 연하의 이선재와 사랑에 빠지는 오혜원에게 감정이입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했기에 내심 충격 받았다.

▲ 이선재(유아인)가 처음으로 오혜원(김희애)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JTBC

그러자 또 다른 이가 힌트를 주었다. 공중파에서의 연하남-불륜 드라마에는 다 장치가 있다. 여주인공 유부녀가 폭력 남편에게 얻어맞든지 악독한 시댁으로부터 모진 구박을 받든지 아무튼 결혼 제도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다음 또순이 캔디처럼 씩씩하게 혼자 살아가다가, 지위가 높은 듬직한 연하남이 등장해서 그녀를 구원해준다는 설정이다. 하지만 <밀회>의 오혜원에게는 '그럴 수 있지'라고 감정이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지질한 중2병 남편 강준형(박혁권)과의 냉랭한 결혼생활? 10년째 이어온 부부라면 대개 결혼생활은 그 정도 작은 온기만 남겨놓고 있을 뿐이다. 남편이 잘난 아내에게 매일 투정부리고 떼를 쓰긴 하지만, 그렇다고 혜원에게 큰 폐를 끼친 건 없다. 게다가 혜원은 서필원 회장(김용건) 일가의 '우아한 노비'라는 실상은 둘째 치고 어쨌든 남들이 보기에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커리어를 쌓아온 아트센터 부대표가 아닌가. 번듯한 집과 직장, 남편, 미모와 재력까지 겸비한 그녀는, 그냥 지금까지처럼 쭉 남 보기에 근사한 인생을 조심스럽게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스무 살 연하 소년 이선재, 자신의 재능이 얼마만큼인지 알지도 못하는 빈궁한 천재 피아니스트와 마주친 뒤 오혜원은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거 뭐야, 설레잖아, 불길하다."(<밀회> 홈페이지 중) 가진 것 하나 없이 사랑 하나만 내세우며 "같이 도망쳐요"라고 간절하게 매달리는 이선재 앞에서, 지금껏 "상류사회 사람이 되고 싶"어서 모든 수모를 견디고 이 자리까지 올랐다는 자조까지 내비치는 그녀에게 "당신, 그럼 왜 다 가지려고 들어?"라는 반문만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 없이도 비교적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데 거기에 왜 '진짜' 사랑까지 가지려 하는데?

그 설명을 듣고서야, <밀회>의 설정이 정성주 작가의 '신의 한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청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패턴의 불륜 드라마, 결코 편하지 않은 주인공을 내세워서, 작가는 시청자들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래도 이들을 좋아할 수 있겠어? 이래도 이들을 이해하겠어? 욕망의 한계를 결정짓고 싶어하는, 아직 그 욕망에 충분히 몸을 던져보지 않은 이들의 순진한 항변에 작가는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일하는 여자 오혜원

상류층과 학계, 예술계의 부패의 한복판에 주인공들이 내던져진 드라마 <밀회>에서 직업윤리라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밀회> 1화부터 가장 강렬하게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오혜원의 일하는 모습을 대단히 길게 강조하며 그녀가 살아온 인생을 별다른 부연설명 없이도 일별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었다.

▲ 이선재(유아인)의 연주 장면을 지켜보는 오혜원(김희애). ⓒJTBC

오혜원은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면서, 서한아트센터가 제대로 굴러가도록 살피는 기본 업무, 서한아트센터 한성숙 이사장(심혜진)을 보필하면서 그녀의 비자금을 제때제때 차명계좌에 분산시켜 넣어주는 작업, 한성숙의 남편인 서 회장의 여자 문제와 비자금 문제를 매끄럽게 해결하는 작업, 서 회장의 딸 서영우(김혜은)의 끊이지 않는 남자 문제를 뒤치닥거리하고 그녀가 충동적으로 시작한 자회사 업무를 돌보는 작업을 한꺼번에 수행한다. 또한 서 회장 일가가 호출하기만 하면 한남동 저택에 찾아가 함께 마작을 즐기며 그들의 보이지 않는 지시와 들리지 않는 싸움을 중재하고 이해하고 교차시켜 주어야 한다. 서 회장과 한성숙, 서영우 사이를 오가는 삼중첩자 노릇을 빈틈없이 수행하며, 서로에게 적절히 정보를 흘려주고 서로에게 감출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닫아야 한다. 지친 몸을 끌고 밤 늦게 집에 돌아오면 그녀를 기다리는 철없는 남편 강준형의 속 모르는 투정을 유연하게 받아넘겨야 한다.

오혜원은 맘 놓고 느긋하게 밥을 먹을 시간도 별로 없다. 언제라도 벌떡 일어날 수 있도록 구두를 신은 채 소파에 드러누워 쪽잠을 자고, 술 취한 상태에서도 정신을 가장 먼저 차려 윗사람들의 밤늦은 비밀 전화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많은 드라마에서 특정 공간을 배경으로 삼았다 하더라도 직업의 명칭만 허공에 떠다니던 것과 사뭇 다르게, 오혜원은 실제로 연봉 1억짜리 기획실장답게 고단한 감정노동을 묵묵히 헤쳐나간다. 거기에는 분명 상응하는 대가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영우 자리, 싫어?"라는 한성숙의 유혹적인 질문 앞에 오혜원은 뒤돌아서서 "그럴 리가"라고 중얼거린다. 그녀는 지금까지처럼 충성을 다하면서 적절하게 우아한 노비 노릇을 하면, 언젠간 아트센터 대표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밀회>의 후반부는 서 회장 일가가 불법 비자금 문제로 검찰의 수사에 직면하게 되면서 오혜원을 그 희생양으로 밀어 넣으려는 시도로 숨 가쁘게 이어졌다. 아무리 성실하게,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며 충성을 바쳐도 오혜원이 '진짜' 상류사회 일원이 될 수는 없었다.

'진짜' 상류사회

속칭 클래식, 정확하게는 서양고전음악을 전공하는 여성들 사이의 계급 재생산 구조는 공고하다. 최샛별의 논문 '상류계층 공고화에 있어서의 상류계층 여성과 문화자본 : 한국의 서양고전음악전공여성 사례'(한국사회학 제36집 1호(2002년), pp. 113~144)이 지적하듯, 부모 대의 경제적 자산과 문화적 자산을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물려받은 이들이 그렇지 않은 계층보다 더 손쉽게 서양고전음악 전공에 편입되고 거기서 학위를 받음으로써 제도적 인정을 받게 된다. 음악계에서 전문가로 성공받기는 매우 어렵지만, 그 음악적 재능과 교육의 축적은 고상한 취향, 즉 상류계층의 상징으로 손쉽게 편입될 수 있다. 재능 하나만으론 성공할 수 없는 곳, 고가의 악기와 레슨비를 오랜 시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재력이 뒷받침되어야만 하는 곳에서 그 시간을 어떻게든 버텨내고 나면 그에 상응하는 보답이 '고상한 아내감'으로서의 자격과 상류층 남자와의 결혼으로 이어지는 공고한 계급 재생산, 레슨으로 벌어들이는 수익 등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 토건사업으로 돈을 긁어모은 서 회장(김용건)은 예술재단을 통해 돈세탁에 열중한다. 그의 딸 서영우(김혜은)는 예술재단 대표로 이름을 걸어놓고 있다. ⓒJTBC

<밀회>의 서영우와 오혜원, 그리고 서브 캐릭터로 설정된 서한음대생 정유라(진보라)와 장시은(김신재)은 이런 점에서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먼저 서영우와 오혜원은 극중에서 마흔 살로 설정되어 있다. 94학번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최샛별의 논문에 따르면 계급차가 공고해지고 한국 사회의 '상류층'이라는 판타지가 가시적으로 형성되어가는 시기, 게다가 한국 사회가 짧은 풍요의 환락을 마음껏 맛보고 있던 시기를 경험했다.

아마도 오혜원이 가난한 집 출신은 아닐 것이다. 오혜원에게는 재능이 있었고 집에서 뒷받침도 가능했으며, 그래서 예중-예고-서한음대에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녀가 피아노를 포기할 만큼 앓은 건초염의 원인이 지나친 근육의 혹사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그녀는 이미 대학교 초반부터 뛰어난 피아노 재능만으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계급 간의 격차를 뛰어넘는 전문 연주자가 되기 위해 그녀는 건초염에 걸릴 정도로 피아노를 연마했지만, 결국 그 때문에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꿈을 접었다. 그래서 그녀는 "영우한테 빌붙어서라도 어떻게든 유학가야지"라는 생각으로 서 회장이 제안한 영우의 수행원 자격으로 함께 유학을 떠난 바 있다.

정유라와 장시은의 경우, 더 노골적으로 계급 격차가 벌어진다. 정유라는 한성숙의 심복인 역술인 백 선생(길해연)의 딸로서, "딸 하나 있는 거 교수 만들겠다"는 백 선생의 의도대로 억지로 피아노를 배워 부정입학에 성공했지만, 자신의 재능 없음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다. 상류층에게 돈을 벌게 해준다는 엄마의 능력이 건재한 한, 그렇게 착복한 돈의 힘으로 그녀는 떳떳하다. 아마 서 회장 일가의 불법 비자금 문제가 터지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엄마의 힘으로 교수 자리를 따내고야 말았을 것이며,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손쉽게 안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장시은은 재능도 고만고만, 집안도 고만고만하다. 첼로 전공생인 장시은은 값싼 악기를 쓴다는 이유로 지도교수 김인주(양민영)로부터 갖은 모욕을 당하고, 결국 김인주가 주도한 악기 비리의 희생양이 된다. "지도 교수가 내친 애를 누가 받아주겠냐?" 장시은은 전공을 바꿀 생각을 하지만, 그렇다 한들 가까스로 대학교를 졸업하는 데 그칠 공산이 크다.

여기서는 끊임없이 "진짜가 뭔데?"라는 질문이 되풀이된다. 오혜원이 원했던 '상류사회'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졸부들의 소우주다. 오혜원 역시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 여자가 제일 꼭대기에요 그럼?"
"꼭대기는 그 여자가 아니라, 돈이다. 아니구나, 진짜 꼭대기는 돈이면 다 살 수 있다고 다 살 수 있다고 끝도 없이 속삭이는 마귀."(<밀회> 8화 중 이선재와 오혜원의 대화)

서 회장으로 대표되는 한국 기업이 7, 80년대에 토건사업으로 긁어모은 돈은 90년대 이후부터 재테크를 통해 끊임없이 증식되고, '음대'라는 화려한 예술계를 거치며 돈세탁에 성공한다. 계급재생산의 소우주, 수많은 희생양들이 감히 항의도 할 수 없는 공고한 질서의 세계. 오혜원은 그곳에 안착하고 싶어했다. 그녀가 진짜로 원한 건 그러니까 상류사회라는 기표 안에 숨어있는 돈과 힘, 임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을 빌려오자면 '돈의 맛'이다. 그동안의 노력으로 서한아트센터의 중추이자 음악계에서 독보적으로 화려한 존재가 되었지만, 그러나 서영우가 지적하듯 그것 역시 '껍데기'라는 데서 모순이 발생한다.

"네 꺼 진짜 뭐 있어? 네가 사는 집도 우리 꺼, 차도 우리 꺼, 가정부도 우리 꺼."(<밀회> 1화에서 서영우가 오혜원에게)

▲ "이게 당신한테 야유받아야 할 일이야? 이만큼 사는 댓가로 던지고 때리면 얻어맞아야 하는 게?" 이선재(유아인)를 만난 후 오혜원(김희애)은 처음으로 자신의 노비 처지를 자각한다. ©JTBC

직장, 집, 심지어 남편까지 오혜원은 서영우에게 딸린 부속물, 잔여물, 잉여만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녀의 집은 한남동이 아닌 청운동이고, 그녀의 직함은 서영우 같은 대표가 아닌 실장(나중에 부대표로 승진하지만)이며, 그리고 남편 강준형마저도 서영우가 잠깐 데리고 놀다 걷어찬 남자다. 그 '가짜'의 세계를 직면하게 된 어린 연인 이선재가 "그 여자 도대체 뭔데 선생님을 모욕하는지" 분노하자, 오혜원은 강하게 부정하려는 듯 단숨에 반응한다. "알 거 없어. 세상 이치 배운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깟 게 무슨 모욕이라고"라고도 덧붙인다.
"무슨 이치가 그래요?"
"퀵배달로 돈 벌어서 컵라면 사먹고 핸드폰 요금내고 전기세 내고 수도세 내고 그러는 대신, 피아노 잘 쳐서 장학금으로 먹고 사는 게 훨씬 낫잖아. (…) 부자들 돈으로 먹고 살면서도 얼마든지 저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어."
"아니잖아요." (<밀회> 8화 중 이선재와 오혜원의 대화)

사랑의 격차, 계급의 격차

<밀회>는 멜로드라마를 마치 스파이 스릴러처럼 바꿔버렸다는 점이 가장 놀라웠다. <밀회>의 주인공들 사이에서는 '정보'가 핵심이었다. 스파이물의 핵심이 'I Know You Know I Know'라는 문구인 것처럼 여기서도 누가 더 정보를 많이 틀어쥐고 있으며 상대방보다 몇 수 앞을 내다보며 다음 수를 두느냐의 문제가 가장 중요했다. 오혜원의 능력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었고, 그녀의 가장 큰 실수는 세상 아무도 자신과 이선재의 사랑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싶어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정신 차려 보니까 세상이 다 감시자인 거야. 세상이 다 눈이야. 여기도 저기도"라는 것을 깨닫고 무너져 내린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어떤 면에서 서 회장 일가의 약점을 쥐고 있는 판옵티콘적 시선의 주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처음부터 그 시선 아래 놓인 죄수였음을 자각한다.

처음으로 게임의 주도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그녀는, 그러나 곧 정신을 가다듬고 맹렬하게 자신의 패를 계산한다. 온갖 수모와 모멸감과 뼈아픈 수치심을 그녀가 못 견딜 거라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오혜원의 머릿속은 논리정연하게 빈틈없이 회전한다. 사실 그녀가 이선재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서 회장 일가의 희생양이 되는 순서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고("이런 일하면서 그쯤 예상 안했겠어요?"), 아마도 선재가 없었다면 그녀는 서 회장 일가와 모종의 딜을 성사시킨 뒤 자진해서 비리를 뒤집어썼을 수도 있다.

▲ 이선재(유아인)가 오혜원(김희애) 앞에서 처음 피아노를 쳤을 때, 그녀는 이 순진한 '어린애'의 재능에 충격받는다. ⓒJTBC
그러나 이선재가 등장하면서 그녀가 두어야 하는 수는 더 복잡해졌다. 왜냐하면, "이용당하기 싫고, 내가 지금까지 이뤄온 것, 앞으로 누릴 것, 그리고 너까지…다 잃고 싶지 않아." (13화 오혜원이 이선재에게) 공교롭게도 그녀의 뜻대로 놓아지지 않는 수가 있으니, 바로 이선재다. 이선재는 순순히 오혜원의 지시를 따르거나, 모르는 척하지 않는다. 그는 계속 묻는다. "왜 안돼요?" "그럼 선생님은요?" 혜원의 게임판에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오혜원과 이선재를 결정적으로 갈라놓는 (혹은 그런 것처럼 보이는) 것은 둘 간의 계급 차였다. 퀵서비스 아르바이트를 뛰던 이선재가 <밀회> 1화에서 서한아트센터에 물건을 배달하러 왔다가, 조인서 교수(박종훈)와 지민우(신지호)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는 오혜원을 처음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는 것은, 우리가 미술관에서 말로만 듣던 유명 그림을 접할 때의 학습된 찬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보기에 너무나도 아름답고, 도저히 가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독보적인 아우라를 가진 존재에 대한 찬탄.

둘의 사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까지, 이선재는 오혜원 앞에서 자신없어하며 말을 제대로 잇질 못한다. 그는 어미를 '잘라 먹는다'. "했습니다"가 아니라 "해서…"라고 말꼬리를 흐리는 그는, 문법상으로 완벽한 문장을 또박또박 구사하는 혜원 앞에서 한없이 작아 보였다. 그는 피아노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어마어마한 재능을 제대로 언어화시키지 못하고, 그것이 하나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했다.

<밀회>는 이 어울리지 않는 두 연인이 어떻게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 이해가 오히려 서로에게 장애물이 되고 짐이 되는지를 무서우리만치 냉혹하게 바라본다. 오혜원은 이선재를 서한재단-예술-마피아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이 세계를 다 버리고 자기와 함께 떠나자는 선재의 순진한 제안에 그녀는 되풀이 반문한다. "네 재능은 썩히고?" 어떤 면에서 이 순간 오혜원이 더 순진한 것이다. 그녀는 어린 연인의 재능을 지키기 위해, 그가 가난한 세계에서 벗어나 부자들의 돈으로 고상하게 먹고 살며 자신의 재능을 떨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금껏 모욕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들을 진짜 모욕이라고 지각하기 시작하면서도 안간힘을 다해 인내한다. "언젠가 꼭 너 같은 애가 퀵배달하면서 유튜브로 네 연주를 따라 친다면, 그걸로 족해."

반대로 이선재는 오혜원이 속한 무시무시한 세계를 조금씩 알게 되면서 그만큼 지쳐간다. 그는 묻는다. "공짜는 없지 않나요?" 오혜원을 더 잘 알게 될수록, 오혜원이 '돈과 힘'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걸 이해하게 될수록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혜원을 아는 것이 오히려 그녀와 자신과의 거리감을 넓힌다는 사실을 그는 깨닫게 된다. 오혜원은 그것을 '세상의 이치'라고 불렀고, 이선재는 그 '이치' 앞에 절망한다. 개인적으로 <밀회>에서 이선재(그러니까 이선재를 연기하는 유아인)의 최고의 순간은, '우아한 노비'라 스스로를 지칭했던 오혜원이 이선재에게 엄살 부리지 말라며 소리 지르고 나가자 혼자 남아 우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입만 열면 사랑한다고 그랬"지만 막상 그녀가 속한 세계의 막강한 보호벽을 깨닫자 한없이 초라해지고 연약해진다. 그는 오혜원이 '홀려 있는' 대상을, 자신이 손쉽게 대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 앞에 무너지면서, 가까스로 항변한다. "제발 자신을 불쌍하게 만들지 마세요."

'찻잔 속의 태풍' 같은 무시무시한 드라마

SNS 상의 대화 중에 이런 표현도 접했다. <밀회>는 김희애에게 스턴트급 연기를 요구한다고. 나는 그에 공감했고, 이 드라마가 어떤 면에선 감정의 액션을 다루는 드라마라는 생각을 햇다. '찻잔 속의 태풍'이라는 표현이야말로 이 드라마, 이 무시무시한 실내극, 어떤 면에서는 밀실극('한남동의 소우주'에서 나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오혜원)에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액션과 살인이 난무하지 않더라도 말 한마디, 눈짓 하나, 손길 하나, 돈다발만으로도 사람을 간단히 질식시켜버릴 수 있는, 그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해버릴 수 있는 폭력의 세계.

▲ 예술재단 이사장이자 서 회장의 후처인 한성숙(심혜진)은 자신의 심복이었던 오혜원(김희애)마저 언제든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 ⓒJTBC

이에 비견할 만한 드라마로는 2004년 작 <발리에서 생긴 일> 정도를 꼽을 수 있을 텐데, 여하튼 이 '불륜의 멜로드라마'가 담고 있는 '세상의 이치'는 참으로 무섭고 비정했다. 재벌가의 힘이 어떤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작동하며 암묵적으로 "역시 사람은 힘이 있어야 돼"라는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드라마들과 달리, <밀회>는 그 판타지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하고 더러운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래 계층 사람들의 '순수'가 모든 것을 감싸 안을 만큼 지고한 가치도 될 수 없음을 냉정하게 응시한다. 이를테면 오혜원과 이선재가 그 '세상의 이치'에 관해 다투는 8화의 장면 같은 경우, 두 사람이 소파에 앉아 같은 자리에서 무려 5분 동안 주고받는 대사로만 이뤄지는데, 밀어를 빙자한 가치관의 대립의 그 팽팽한 기운은 구경꾼인 시청자의 기운마저도 소진시켜 버렸다. <밀회>를 한국 드라마 사상 가장 야심적인 드라마로 꼽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밀회>는 5월 13일 화요일에 마지막 화를 방영한다. 이 드라마의 결말이 어떻게 끝날지는 알 수 없다. 설령 오혜원과 이선재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섣불리 '해피엔딩'이라고 부르기는 힘들 것 같다. 두 사람의 '밀회'가 공개적인 사랑으로 바뀐다 하더라도, 이미 두 사람은 너무나 많은 상처와 모멸감과 패배감을 뒤집어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얻은 것이 가치 있다고 믿는다면, <밀회>의 결론이 어떻게 나더라도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밀회>의 각본을 쓴 정성주, 연출을 맡은 안판석, 주연을 맡은 김희애와 유아인, 박혁권, 심혜진을 비롯한 모든 배우들, 당신들 모두 미쳤다. 그 이상 더 덧붙일 수 있는 말이 없을 것 같다.

▲ 처음으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는 이선재(유아인).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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